말을 잘 들어보겠다는 결심

2023. 10. 31.

손톱 옆에 거스라미를 뜯어내다가 염증이 생겨서 한동안 손가락이 아팠다.
오른손 넷째 손가락이 퉁퉁 부어올라서 연필을 잡고 공부를 하는 데에도 불편함이 있었다.

손가락이 너무 거슬려서
화요일 오전, 연구실에 잠깐 들러서 이런 저런 일을 처리하자 마자 외출하여
피부과 점심 시간이 걸리기 전에 피부과에 가서 약을 처방받아 왔다.

병원비를 결제할 때에 내가 집에서 지갑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병원비 결제는 계좌이체로 하였다.
사실 딱히 지갑이 없다고 해도 사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딱히 지갑이 급하게 필요한 사정은 없었지만,
나는 지갑이 없는 상황이 너무도 불안했다.
응당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바다가 준 부적이 있기 때문이다.

바다가 준 부적과, 바다가 부적을 써준 그 마음 덕분에, 내 인생이 잘 풀릴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지갑이 없는 상황이 너무 불안하여 바로 연구실에서 퇴근하고 집에 왔다.

집에 도착한 뒤 지갑을 찾고, 부적을 항상 왼쪽에 지니고 있으라는 말을 따라
바다가 준 부적이 든 지갑을 왼쪽 가슴 심장 위에 올려둔 채 잠깐 낮잠을 잤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것은 없었다 생각하지만, 오전 내내 지갑과 떨어져 있었던 것을 반성하는 마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 지갑도 바다가 준 선물이다.
나의 삶과 형편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바다가 준 선물이다.
돌아보면 바다는 그렇게 항상 나를 응원하고 잘되기를 기원하고 있었다.

이제 그 마음을 좀 더 믿고 따르려고 한다.

나는 손톱 옆에 거스라미가 있으면 누가 뭐래도 잡아 뜯는 사람이다.
그것을 뜯으면 응당 염증 때문에 한동안 손가락을 못쓸 것을 알아도 그냥 잡아 뜯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잘되기를 늘 응원해주는 네가 있기에,
나는 바다 말을 조금 더 잘 듣고, 아무튼 그렇게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러니 앞으로 말 잘들어 보도록 노력할게. (말 잘 듣는다고는 안함)
사랑해.

어느 아침에 있었던 일

2023. 10. 22.

어느 날과 같이 너를 안고 자다가
문득 참을 수 없이 차오르는 마음에 너에게 결혼하자고 속삭였다.
잠에 취한 목소리로 뜬금없이 한 청혼에, 너는 알겠다고 했고 내 청혼에 행복했다고 했다.

뜬금 없었겠지만, 그건 아무렇게나 주워댄 말이 아니고,
그냥 너를 안고 있는 그 순간에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라서, 그 말을 토하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어서 한 말이었다.

왜 결혼하자고 했느냐는 너의 물음에,
나는 네가 편해진 모습을 보고 좋아서라고 대답했는데
너는 조금 더 로맨틱한 대답을 기대 했겠지만 사실 그 아침의 내 마음은 누구보다도 로맨틱한 기분이었다.

앞으로도 평생 그런 모습을 보고 싶을 정도로 네가 귀여웠기 때문에,
눈을 감고 못들은 척하려 애썼지만, 그 순간의 네 표정이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에.

네 모습에 나는 숨을 최대한 고르게 쉬면서 너를 부끄럽지 않게 해주려고 노력하였으나,
사실은 아주 장난스럽게 너를 놀리고, 괴롭히고 싶은 마음도 들었기 때문에,
네가 앞으로도 계속 내 장난에 장단을 맞춰줬으면 좋겠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은지 정말 몇 초도 되지 않아서 코를 골며 자는 너를 보며 나를 편하게 생각하고 내 곁에서 안심하는 네가 좋았기 때문에,
너를 앞으로도 편하게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에.

너와 결혼하고 싶었다.

너와 같이 있는 것보다 지금 나에게 가치있는 것은 없어.
오늘 너를 안고 잔 것처럼 내일도 너를 안고 자고 싶고, 그냥 너와 닿고 있는 지금 이 모든 순간이 너무 행복하기만 하다.
그 행복이 목 끝까지 차올라서 결혼하자고 말한 것 뿐인데,
네가 내 생각보다 너무 그 말을 좋아하고 반가워 하기에 너무 기쁘고 고마웠다.

너와 결혼해서 너를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나중에 내가 조금 더 준비가 되면,
그때 더 멋있고 로맨틱하게 말해주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은 미안하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오늘 아침과 같이 멋대가리 하나 없이 툭하고 뱉어버리듯 청혼해야 했을 정도로 내 마음을 충만하게 한 네 책임이다.

하지만,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나이니,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 책임을 대신하여서 언젠가 다시 멋있게 다시 프로포즈 해줄게.

사랑해.
나와 결혼해줘.

사랑하는 바다에게

2023. 6. 2.

나의 연구비 지원을 묵묵히 기다려주며 같이 새벽을 맞이한 당신에게,

그다지 좋지도 않은 컨디션이었던 것 같은데,
나와 함께 밤을 꼬박 샌 때문일까?
잠깐 일어나서 연락한 듯 싶더니, 다시 연락이 되지 않는다.
아마도 다시 자고 있는 것이겠지.

당신은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이 매우 다행스럽게 느껴지는 사람이라,
밥은 챙겨먹었는지 안부를 묻기도 조심스러운 사람이라,
스스로의 삶이 무겁고 어둡다고 말하는 사람이라,
이 우주 새끼가 당신에게 친절할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라.

나는 당신이 안쓰럽다.
그래서 어떻게든,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다.
당신이 스스로 사랑스러운 만큼, 당신이 그저 사랑스럽기만 하길 바라기에.

그러니 당신의 애인이 되기로 한 나에게,
그것도 당신의 삶을 찬란하게 해줄 보석같은 애인이 되기로 한 나에게 (생의 주인에게 아직 허락받진 않음)
무엇이든 요구하라고 하였더니, 내게 편지를 써주길 바란다고 했다.
아마도 의도한 것은 손편지였겠으나, 그것이 당장은 여의치 않으니, 일단은 자판을 토독토독 쳐보기로 했다.

언젠가는 네게 편지를 써주고 싶었어.
그리고 앞으로도 종종 편지를 써줄테지.
당신을 생각하며 글을 쓰는 것은 나에게 큰 기쁨이지만,
우선 이 글에서는 내가 당신에게 글을 써주는 것이 얼마나 큰 부담인가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당신은 나의 글씨체를 단정하다고 평했지만,
사실 당신이 단정하다는 그 글씨를 당신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바다 보고싶다’는 그 짧은 문장을 두세 번 연습해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나의 글씨는 사실 그렇게 예쁘지 않다.

내용은 또 어떠한가?
시를 좋아하는 여자에게 연애편지를 쓰라니, 그야말로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어떤 미사여구로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더라도,
더 아름다운 사랑의 문장이 당신의 머릿 속에 이미 있을테니 말이다.

그러니 나는 진심과 귀여움으로 승부하고자 한다.
내 글이 썩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바다에게 글을 쓰기 위해 낑낑댔던 경승이가 귀여우니 조금은 봐주도록 하자.
내 글에 담긴 내 마음은 모두 진심일테니 말이다.

나는 한바다를 사랑한다.
이 말은 진심이니, 이 말을 믿고 당신이 기분 좋은 하루를 보냈으면 한다.

손편지는 곧 쓸것이다.
그러나 심심하면 이 곳에도 당신에 대한 글을 쓸 것이다.
심심하면 들어와서 읽어도 좋다.

제6공화국의 주인공

2022. 6. 10.

마침 6월 10일이라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공화국 시리즈’라 불리는 드라마가 있다.
1981년 제1공화국 방영을 시작으로 2005년 제5공화국 방영까지 각각의 공화국 시대의 정치적 상황과 주요 사건들을 다룬 현대 정치 사극이다.
그중 내가 본 것은 제5공화국뿐이 없는데, 드라마 제5공화국은 10.26.사건에서 시작하여 5공 청문회까지 다루며 전두환 정권기의 각종 사건에 대해 잘 다루고 있다.

‘제6공화국’ 역시 마땅히 드라마로 다루어져야 하건만, 아직 개헌이 되지 않아 제6공화국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제작 계획은 요원한 것 같다.
이러한 면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개헌 발의가 국회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쉽다.

그런데 만일 드라마 ‘제6공화국’이 만들어진다면 그 주인공은 누가 되어야 할까?

예전에는 시즌제 드라마로 시작하여, 노태우-김영삼 정부를 시즌 1,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시즌 2,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시즌 3 이런 식으로 시즌을 나누어 방영을 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전 공화국 시리즈와는 다르게 제6공화국은 ‘주인공’이 명확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 1987은 이러한 면을 잘 알고 87년 민주화운동을 ‘군상극’의 형태로 연출하였다.
영화는 명확한 주인공이 없음에도 등장인물들이 각자 자리에서 자기의 역할을 하며 만들어낸 이야기들이 모이고 조직되어 힘을 얻고 민주화라는 하나의 큰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영화가 그렇게 연출될 수밖에 없었듯이 87년 민주화운동은 시민이 주인공인 사건이고,
그 결과로 출범한 제6공화국 역시 시민이 주인공인 시대이다.
‘한국인은 국난극복이 취미’라는 농담처럼 실제로 제6공화국의 동료 시민들은 민주화를 위해 각자의 역할을 해왔다.

역사는 영웅의 것이 아니라 민중의 것이다.
따라서 응당 드라마 제6공화국의 주인공 역시 민중이고 시민이어야 할 것이다.

시민이 주인공인 역사가 자랑스럽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연세대학교 출신임을 자랑스러워 한다.
입시결과 때문이 아니라 이한열 열사를 비롯하여 제6공화국의 문을 가장 앞에 서서 열어준 동료시민들을 동문 선배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이 주인공인 드라마 제6공화국을 기대한다.

‘어떤 나중에’는 ‘어떤 당장’보다 빠르다.

2022. 4. 2.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특히 시민의 기본권과 자유권 등 여러 사회적 진보 의제에 있어 문재인 정부는 ‘나중에’를 외치기 바빴다는 것이다.

2017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가 참석한 성평등 관련 행사에서 문재인 후보의 기조연설 도중
성소수자 운동가들이 난입하여 문재인 후보의 발언을 막고 거센 항의를 한 사건이 있었다.
그 때 그 행사의 참석자들이 나중에 발언 기회를 얻어 발언하라며 “나중에!”를 외치며 운동가들의 항의를 봉쇄한 일이 이었는데, 그 이후 진보정당 및 그 진영에서는 민주당은 성소수자 문제 및 각종 사회 의제를 맨날 ‘나중에’ 해결하려는 것이냐고 비꼬곤 해왔다.

그러나 정말 민주당 정부에서 아무런 진보가 없었는지 되묻고 싶다.

민주당 지지층의 이념 성향은 매우 넓고, 그중에는 혐오문제에 있어 국민의힘과 유사한 사상을 가진 사람도 있다.
하지만 민주당 지지층 중 진보 블록에 속하는 사람도 분명 있고,
그 사람들이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은 진보 의제에 덜 진심이라나 혹은 당사자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반보라도 전진’하는 것이 ‘모 아니면 도’와 같은 선명성 투쟁보다 사회의 진보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민주당을 지지하는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은 ‘가장 급진적인 진보는 다수파가 되는 것’임을 믿는 사람들이다.

지난 2017년 대선 때 정의당 심상정 후보를 뽑겠다는 후배에게 문재인을 뽑아달라고 말하면서,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동성혼까지는 못하겠지만 임기 내에 낙태, 양심적 병역 거부 등 그동안 사회 갈등을 일으켰던 많은 의제들에서 의미있는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했고, 결국 이뤄졌다.
이번 대선에서도 이재명 후보가 당선이 되었다 한들 동성혼을 인정하는 나라가 되긴 어려웠을 것이나,
연대관계인 제도 등으로 우회해서 관련 부분에 유의미한 진전을 이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진보는 그렇게 반발짝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진보정당 지지자들은 항상 민주당이 사회적합의를 핑계로 개혁의제에 ‘나중에’를 말한다고 한다.
왜 진보정당들처럼 ‘당장’을 외치지 못하냐고 한다.
그러나 ‘어떤 나중에’는 ‘어떤 당장’보다 빠르다.

심상정 후보는 이번 대선의 토론회에서 이재명 후보에게 당장 차별금지법의 입법을 약속하라고 윽박질렀다.
본인이 입법기관인 국회의원이고 이재명 후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본인이 할 생각은 없고 이재명 후보와 민주당이 하라면서 민주당에게는 의지가 없다고 힐난한다.

심상정 후보의 그런 태도는 결국 진보는 민주당이 이뤄내야 한다는 자백이다.

심상정 후보와 정의당의 왜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관철하지 못하는가? 의석이, 힘이 부족하다고?
민주노동당이 탄생했을 때부터 진보정당이 자신들의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지역정치를 외면하지 않고, 사람들을 설득하며 끝내 기반을 잡았다면, 지금은 진보정당의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결국 진보정당이 ‘당장’만을 외치며, 멋이 없어보이는 지역정치 같은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무엇도 이룰 수 없는 약한 지지기반만 남았다.
사회가 진보하지 못하는 것은 민주당이 의지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정의당이 패션 정치, 화전민 정치만 해왔기 때문이다.

이재명 후보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논란이 되니까 사회적 합의를 핑계대는 것 아니냐는 심상정 후보의 질문에, 사회적으로 논란이 있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에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선정을 실현시키기 위해 사회 전체의 의견을 거스르는 계몽 군주가 필요하지 않다.
다소 늦더라도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있도록 사회 구성원들을 꾸준히 설득하며 조금씩 함께 실현해 나아가는 것이 옳음을 믿는다.

어떤 진보진영 지지자는 나에게 ‘나중에’를 곱게 포장하려 애쓴다고 비아냥대기도 했다.
나는 “네, 님은 그냥 계속 민주당 지지자 싸잡아 욕하고 계세요. 저는 그동안 민주당 개저씨들 설득해서 반발짝이라도 앞으로 나아가 볼게요. 5년 뒤에 반보 앞에서, 또 반발짝 가지고 싸워요”라고 답했다.
결국 반발짝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이고, 너희는 지금도, 앞으로도, 우리가 나아간 반발짝 앞에서도, 계속 입만 털고 있을 것이라는 조롱이지만,
그 분들은 사회 진보 의제에 진심인 것이 아니라, 패션으로서 진보를 말하는 분들이니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2022년 우리는 대선을 졌고, 이로부터 사회적 퇴행이 일어날 것임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다가오는 보수정부로부터의 사회적 퇴행을 가장 앞에서 막아내야 하는 것도 결국은 우리다.

윤석열 당선인과 그리스 신화식 자기실현적 예언

2022. 3. 22.

윤석열 당선인의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 계획이 화제다.

코로나, 산불 등 당선인이 챙길만한 현안이 산적한 가운데, 차기 5년을 이끌어 갈 대통령 당선인으로서 내놓은 ‘국정과제1호’가 ‘대통령 집무실 이전’인 것도 이상한 일이고,
대통령이 가야겠으니 국방부와 합참에게 당장 짐을 빼고 방을 비우라고 하는 것도 절차, 예산, 권한 문제에 있어서 합당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

국방부와 합참 이전에 따른 안보 공백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또 대통령실이 용산으로 갈 경우 대통령 출퇴근 시 교통 통제 등으로 인한 교통체증, 대공포대 재배치, 고도제한 등에 따른 용산과 그 인근 지역의 부동산 개발 문제도 논란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미군기지 반환에 따른 환경 정화 및 그 비용 문제도 중요한 논쟁거리 중 하나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과 관련한 수많은 우려에 그를 불식시킬만한 제대로 된 대답은 어디에도 없지만,
당선인은 청와대에 하루라도 들어가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는 ‘공간이 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에 청와대에 하루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아크로비스타’에 살고 있는 당선인이 하기에 그다지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아니다.

취임일부터 국방부 청사를 쓰겠다고 했다가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지니 서초동 자택에서 통의동으로 출퇴근하겠다고 한다.
통의동으로 출퇴근한다 하더라도 가까운 청와대 관저에서 지내며 출퇴근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만,
당선인은 청와대로는 한 발짝도 들어갈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당선인은 청와대 내부에 있는 소위 벙커, 국가위기관리센터에도 안들어간다고 한다.
대신 불편을 감수하고 대통령이 지방 출장 시에 임시로 사용하곤 했던 국가지도차량을 집무실 이전 때까지 위기관리센터로 사용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모두 무리한 계획이지만, 거침없다.

대통령실 이전은 지금부터 이전 계획을 세우고, 숙의하여 절차에 맞게 이전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하루라도 청와대에 들어가면 죽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너무도 이상하다.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이상하니, 청와대에 가면 안되는 다른 이유, 혹시 당선인이 무속적인 영향을 받아 이상한 결정을 한 것이 아닌지에 대한 의심도 커지고 있다.

윤석열 당선인의 무속 논란은 후보 시절부터 줄곧 제기되어 왔다.
대통령 후보경선 과정에서 당선자는 ‘천공스승’을 멘토라고 말한 바 있으며, 그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유승민 후보에게 천공은 훌륭한 분이라고 역정을 냈다고 알려진 바 있다.
또한 ‘건진 법사’와 같은 무속인이 실제 캠프 내에서 실무책임자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공개된 김건희 씨 통화 녹취에 따르면 김건희 씨는 ‘도사님’들과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는 걸 좋아한다고 직접 말한 바 있고,
실제 김건희 씨 또는 당선인 본인과 인연이 있다는 무속인들의 제보와 증언도 다수 있었다.

여기에 청와대가 흉지이며, 용산은 용이 지나다니는 왕의 땅이라는 풍수지리적 견해까지 덧붙는다.
청와대는 최고의 흉지이며, 죽은 자들이 가는 땅이고,
그렇기 때문에 역대 대통령들의 말로가 다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시중에서 돌았다.

그런고로 대통령 당선인이 청와대로 가지 말라는 도사님의 무속적 계시를 받아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밀어붙이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여론은 좋지 않다.
보수언론조차 대통령 집무실을 말리려는 사설과 칼럼을 내놓고 있고
윤석열 당선인의 국정 수행에 대한 기대치 여론조사에서 아직 취임을 하지도 않았는데 부정이 긍정을 앞서는 ‘데드크로스’가 일어나버렸다.
취임도 전에 레임덕이 왔다며 ‘취임덕’이라고 놀리는 사람도 있다.

윤석열 당선자의 이러한 행보와 일련의 상황은 그리스 신화식 자기실현적 예언을 떠올리게 한다.

당선자가 무속인으로부터 청와대에 들어가면 망한다는 ‘신탁’을 받았는데,
사실은 그것이 대통령이 되면 망한다는 비유적인 뜻이었으나,
그 예언을 들은 당선자는 어떻게든 청와대에 가지 않으려고 각종 무리수를 던진다.
그리고 그 무리수들 때문에 결국 진짜 망함으로써, 대통령이 되면 망한다는 예언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나는 심미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으로서 당선자가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 건 때문에 망하기를 바란다.
정치적인 의견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더 문학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코발렙스카야 그랜트

2022. 3. 14.

세계수학자대회는 4년 주기로 열리는 국제수학학술회의로서 전 세계에서 대략 5000여 명의 수학자들이 참가하는 가장 큰 규모의, 전통이 있는 학회이다.
수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 필즈 메달의 수여도 세계수학자대회에서 이뤄진다.

나도 대학원 입학 직전인 2014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수학자대회에 참석해 본 바 있다.
당시에는 아는 것이 없었지만, 많은 수학자와 대화도 해보았고, 영감도 얻었으며, 여러 세션에서 강의도 들어봤다.

2022년에는 러시아 상트빼째르부르크에서 세계수학자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나는 박사과정생 또는 박사학위를 취득한 지 6년 이내의 신진수학자들에게 참가비용 및 숙박비, 식비, 체재비 등을 지원해주는 ‘코발렙스카야 그랜트’에 지원했고, 운이 좋아 그랜트 수여 대상자로 지정되었다.

그랜트를 받은 것도 내 경력에 어쨌든 좋은 일이고,
이제 학술적으로 조금은 비빌 수 있는 부분이 있으니, 많은 수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더 성장할 기회가 되길 바랐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팬데믹이 정점을 지나는 분위기에 따라 여름쯤에는 종식 선언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있었기 때문에
대회가 끝나고도 며칠 더 체류하면서 코로나 이후 첫 해외여행, 그것도 여름의 상트빼째르부르크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기뻤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결국 국제수학연맹이 러시아의 개최를 거부하였고, 결국 세계수학자대회는 온라인으로 치러진다고 한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나의 코발렙스카야 그랜트 수여는 취소되었다.

전쟁을 일으킨 푸틴은 나의 원수이다.
그에게 김재규 같은 충신이 있길 바란다.

마지막 패배

2022. 3. 10.

더불어민주당이 대선에서 졌다.
5년만의 정권교체다.

민주당 지지자로서 무너지는 마음을 추스리기 벅차다.
아직 더 해볼 것이 남아 아쉽기 때문이고, 그동안 이뤄놓은 것들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까 두렵기 때문이다.

늦은 밤까지 대선 결과를 괴로운 마음으로 지켜보다 잠들었고,
눈을 떴을 때는 어떤한 의지도 기력도 없어서 오늘은 내내 집에 누워 앓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놓았더니, 집 앞 공원에서 할머니들이 깔깔대며 대선 결과를 기뻐하는 소리가 들린다.
억장이 무너진다.

 

승자는 눈을 밟아 길을 만들지만, 패자는 눈이 녹길 기다린다 했다.
다시 겨울이 왔지만 우리는 눈을 밟으며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재명 후보를 뽑아달라고 말한 사람들에게 민주당원이 되어서 민주당을 지켜달라고 부탁하려 한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패배이길 바란다.

남천

2022. 2. 22.

어제 K3를 팔기 위해 행신에 간 김에
엄마, 연주와 파주 조인플라워에 드라이브 겸 다녀왔다.

이런 저런 식물을 파는 화원 같은 곳이었는데, 연주가 뭐 하나 사준다고 골라 보라고 했다.
평소 식물을 크게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좁은 집에 식구 하나 더 들여서 뭐가 좋겠나 싶어 처음에는 거절했었다.
그러나 남천이라고 불리는 이 아이를 보자마자 너무 예뻐서 반했고,
가격도 8천원 밖에 안하길래 우리집 식구로 들이기로 했다.

결혼 초부터 우리집에서 함께한 녹보수 선생님이 푸른 색이시니,
그 옆에서 좋은 색감을 내줄 것을 기대하기도 했고,
키우기 쉽다고도 하고, 미신이지만 액운을 막아준다고도 하니 더 좋았다.

남천은 햇빛을 잘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우리집은 채광이 좋다.
이 집을 계약한 결정적인 이유도 채광과 거실 창으로 보이는 정원이었다.
오늘 도시가스 안전점검을 하러 오신 아주머니도 집 앞 전경과 채광이 참 좋다고 하셨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고 하는데,
나는 팔자좋게 화분과 햇빛 이야기나 하고 있다.
평화로운 나의 일상을 위해서라도 선제타격 운운하며 한반도의 안보위기를 초래하는 얼치기 정치집단이 정권을 잡지 못하길 바란다.

세계 정세가 불안정해짐에 따라 3차 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
Franz Ferdinand를 들으며 알탕에 소주 한잔 하려 한다.

디오판토스의 나라

2022. 2. 5.

간밤에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과 한복 공정에 대해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중국이 한복을 자기들 것으로 우기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인데,
마침 이번 베이징 올림픽의 개막식을 기회로 한복을 입은 조선족을 앞세워 한복이 마치 자기들 것인양 하는 행태에 많은 한국인들이 분노한 듯 하다.

개인적으로 중국의 타국 문화뺏기는
중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한 것에 비해 문화적으로 덜 성숙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며
근 몇 년 내에 중국인들 스스로도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뭐 우리도 가까운 과거에,
싸울아비가 사무라이의 어원이었다느니, 환국이 어쨌다느니,
그런 식의 문화공정을 통해 문화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티를 팍팍 내야했던 때가 있었고,
그 얼마 뒤에는 ‘두유노우싸이?’ 이 지랄하고 있었던 때가 있었으나,
전 세계적으로 꽤 인정받는 문화강국이 된 지금은 마치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우리 문화를 과장하며 문화공정을 하려 하지도 않고,
‘두유노우비티에스’ 이런 질문도 안하며, 되레 그런 과거를 되려 부끄러워하고 있으니까.

중국의 문화공정 중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화두는 “윤동주는 어느 나라 시인인가?”라고 생각한다.

윤동주는 1917년 중화민국 길림성에서 태어나, 1945년 2월 일본제국 후쿠오카에서 죽었다.
윤동주가 살았던 시기에 조선 내지는 대한제국, 대한민국과 같은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스로를 조선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화두를 왜 흥미롭다고 생각하는지는 이 글에서 밝힐 것은 아니고,
이 글에서는 윤동주처럼 국적에 대해 다양한 주장이 가능한 ‘디오판토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디오판토스는 부정방정식과 정수론 쪽에서 연구 업적을 남긴 수학자이다.
수학 교과서 뿐 아니라, 위키피디아 등등 모든 자료에서는 디오판토스를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라고 하고 있다.

물론 그의 이름이 매우 고대 그리스 수학자 같기는 하다.
그런데 정말 디오판토스는 고대 그리스인인가?

먼저 고대 그리스가 어떤 시기인지 살펴보면,
고대 그리스는 학술적으로 기원전 1100년부터 기원전 146년까지로서,
우리가 흔히 ‘고대 그리스’하면 생각나는 아테네, 스파르타 등의 도시국가와 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 등이 있던 시대를 지나,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에 의해 점령된 시기와 그 이후의 헬레니즘 시기를 지나,
기원전 146년에 로마가 그리스를 속주로 삼으면서 ‘고대 그리스’는 끝이 난다.

그런데 디오판토스는 대충 기원후 3세기 정도에 활동하였다고 알려져 있다.(정확한 생몰년도는 알려져있지 않음)
즉, 3세기인 디오판토스는 시기적으로 고대 그리스인이 아니다.

또한 디오판토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가 태어난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 전역과 이집트, 페르시아 등을 씹어먹고 다닐 때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을 따 이집트에 지은 도시이며,
알렉산더 대왕 사후 이집트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세워지면서 그리스와는 별개의 도시가 되었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대충 1세기 즈음)부터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3세기의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그리스라고 할 수 없으므로,
알렉산드리아인 디오판토스는 지리적으로도 고대 그리스인이 아니다.

그런데 왜 모든 수학 교과서에서 디오판토스를 고대 그리스인이라고 하죠?